01 “이번에 오신 검사님이죠?” 이쪽으로 오세요. 어, 성함이. 죄송합니다. 이런 쪽으론 기억력이 영.” “심주희요.” 어두운 갈색의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신임 검사는 답했다. 검사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이십 대를 넘지 않은 나이로 보였지만 그녀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속해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듯 올곧은 눈...
* 선울 그것이 밤중에 도망을 하였습니다. 서연은 뜰 한편에서 그르렁대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갈아입는다고는 한 모양이나 겉옷자락만이고, 두꺼운 손톱 아래 갈색으로 변한 핏자국이 엉겨 있다. 길들인 수라 같은 모습이다. 주인은 태연하게 손으로 턱을 괸 채 답한다. 그래서. 바라는 대로 해 주었습니다. 알았다, 가 보아라. 멀어질 만하면 한 차례씩은 반드시 ...
지방의 한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창작 백합 소설입니다.
15 “도련님께서 안부 전하라 하셨습니다.” 정오, 유린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던 그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그리 말했다. 말한다기보다는 좀 더 기계적인, 녹음된 것을 재생하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랬겠지. 그렇게도 집요하게 사건을 은폐하고 정체를 숨기려 했으면서, 직접 이곳에 얼굴을 비쳤던 것은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겠지. 유린은 서연과 같은 제복을...
14 유린은 재심을 청구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부터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자진해서 죄를 뒤집어썼고, 증거를 조작했다. 증인도, 새로운 증거도 없었다. 희수는 죽었고, 그토록 집요하게 사건을 덮으려 했던 형제들조차도 유린이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몰랐다. 체포되는 순간부터 유린을 인간 이하로 취급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수사 과정에서 경찰이 크게 잘못을 ...
13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유린은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차를 몰아갔다. 도착한 곳에는 두 남자가 쓰러져 있었고, 핏자국이 하얀 벽을 더럽혔다. 바닥에 널브러진 두 자루의 칼에는 두 사람의 것일 터인 붉은 피가 마르지 않은 채 흘렀다.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희수가 넋을 잃은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누구한테 말해야 할지 몰랐어요, 난, 난…...
12 불행인지 다행인지, 유린의 자살미수는 큰 문제로 번지지 않았다. 지난번 다른 사형수가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을 때에 비한다면 이번 일은 거의 없었던 일처럼 처리되었다. 낮 시간에 사형수동 근무를 서던 김 교위가 다른 구역으로 이동되고, 해당 시간의 근무가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다는 것뿐이었다. 새로운 주간 근무자는 이제 막 교육을 마치고 나온 신출내기...
11 미수였다. 혼자 감금된 죄수가 감독자의 시선을 피해 자살을 기도하는 것은 그 자신이 처한 부자유로부터의 탈출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살아 있음을 느꼈을 때 유린은, 자신의 삶을 작별하는 일조차도 뜻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 슬퍼졌다. 이대로 눈을 뜨지 않을 수 있다면 그편이 더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법이 그 목숨을 박탈하기 전까지, 죄인...
10 강유린은 사생아로 태어났다. 유린이 아직 아이일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홀로 된 어린아이는 모계 친척의 손에 맡겨졌고 그때야 비로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그녀의 아버지, 기업인이었던 그 남자는 대단한 수완가였지만, 능력을 뒷받침해 줄 충분한 자본과 권력이 없었다. 남자는 자신 앞에 놓인 높은 ...
09 서연은 거짓을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선의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을 비틀거나 없는 일을 꾸며내는 모든 일에 서툴렀다. 자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마음을 편히 가지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그것을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 한 번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다음은 점점 쉬워진다는 것을 알았지만, 서연에게는 그 ...
08 얼마 전 그 건물에서 가스 폭발이 있었다고 했다. 세 들어 살던 학생 중 하나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서 죽었는데, 서연이 찾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했다. 현실감이 없었다. 죽었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겨우 2주 전에 여기서 편지를 건넸고, 그녀는 편지를 읽고는 울었고,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했는데. 어째서. 어떻게. 누군가 몸 안을 쥐어...
07 그날 서연이 알게 된 사실은 많지 않았다. 유린이 그토록 절박하게 찾던 사람이자, 서연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린 그 여자의 이름이 김희수라는 것. 희수와 유린이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가 유린에게 있어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짐작뿐이었다. 희수는 서연에게, 편지를 전해 주어 고맙지만 지금은 어떤 답도 전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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